신륵사, 영릉을 돌아봤어요
2011년 7월 20일 양평읍 한 모텔에서 눈을 뜨니 07시경이 되었다. 돌아볼 곳을 찾다가 여주 신륵사를 돌아보기로 하고 차를 몰았다. 신륵사는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한 절로 원효대사의 꿈에 흰 옷을 입은 노인이 나타나 지금의 절터에 있던 연못을 가리키며 신성한 가람을 지을 곳이라 알려 주고 사라졌다한다. 원효대사가 절을 지으려고 했으나 뜻대로 잘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7일 동안 기도를 드리고 정성을 드리니 9마리의 용이 나와 승천한 후에야 그 곳에 절을 지을 수 있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고 한다.
08시경 신륵사 주차장에 도착하니 주차장은 차 2대 정도만 있고 여기 저기서 공사가 한 창이다. 신륵사 일주문에서 신륵사까지 양쪽으로 조경공사가 한창이다. 여기 저기서 포크레인들이 분준히 움직인다. 나무를 캐는 포크레인, 나무를 옮기는 포크레인, 나무를 심는 포크레인 등 여러 대의 포크레인소리로 요란하다. 주차장에서 신륵사 입구를 찾다가 기와 집이 보이고 몇 대의 차가 보여 시멘트로 포장된 길을 따라 차를 몰았다. 아직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기념품 가게를 열지 않았다. 기념품 가게 옆에는 승용차를 비롯한 몇 대의 차가 주차해 있다. 기념품 가게 옆에 있는 차들 옆에 주차를 했다. 한 인부가 다가와 차를 몰고 주차장으로 나가란다. 차를 주차장에 주차하고 걸어서 들어오란다. 공사 차량이 다니는데 불편을 준단다. 아내를 기념품 가게 옆에 내려주고 차를 몰고 주차장으로 갔다. 주차를 하고 일주문을 통과하여 절로 걸어 들어갔다. 일주문에서 매표소까지 나 있는 길은 직선이지만 아직 공사중으로 포장이 되어있지 않은 흙길이다. 길 왼쪽으로 기와집들이 보이는데 템플스테이를 하기 위해 지은 집들로 보인다. 사람들이 많지 않고 이른 아침이라 표를 팔지 않는 것 같아 매표소에는 가지 않고 나무를 실고 들어가는 공사차량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신륵사 안으로 들어서려니 매표소에서 한 할아버지가 문을 열고 표를 사고 들어가라고 소리친다. 매표소로 다가가 문화재 관람료를 지불하고 신륵사로 들어갔다.
<신륵사 일주문>
신륵사까지는 50여m는 되는 것 같다. 신륵사로 걸어가는데 오른쪽 강가에 정자가 보인다. 정자치고는 꽤 넓은 정자다. 정자에 올라가면 시원한 바람이 불고 정자 앞으로 흐르는 남한강이 보여 더욱 시원할 것 같았다. 정자에 올라가 쉬자고 아내에게 말하자 공사 때문에 시끄러우니 더 들어가보잔다. 좀 더 들어가니 왼쪽에 신륵사의 건물들이 보인다. 신륵사 건물 중앙의 2층 기와집 건물에 한글로 극락보전이란 현판도 보인다.
<신륵사 전경>
<극락보전>
신륵사 미륵보전 건물 앞에는 모래가 쌓여있고 나무가지도 어지럽혀 있다. 신륵사 오른쪽 산 비탈 바위 위에 정자가 보인다. 전에 왔을 때 이 정자만은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다. 이인초등학교에 근무 시절 내가 담임했던 6학년 학생들 그리고 사물놀이 반을 데리고 용문사에서 열린 전국 사물놀이대회에 참가 후 이 곳 신륵사 관광지에서 하루 저녁 숙박하고 신륵사를 관람한 적이 있다. 신륵사 경내는 정자에 가서 쉬었다 둘러보기로 하고 강가의 정자로 다가갔다. 정자에는 강월헌(江月軒)이란 현판이 붙어 있다. 정자 옆에는 작은 3층 석탑이 서 있다. 장마 뒤 끝이라 그런지 아니면 4대강 사업을 하느라 그런지 강물은 맑지 못하다. 강물의 양은 괘 많으며 흙탕물이 소용돌이 치며 흐른다. 정자 아래 강물에서는 대여섯 마리의 오리들이 빙빙 돌며 놀고 있다. 강건너에도 나무를 실은 차들이 오가며 조경사업을 하고 있다. 건너편 제방에는 콘크리트 구조물을 설치하는 공사가 한창이다. 이 곳에도 4대강 사업을 하는 모양이다. 강건너 공사장 뒤로 푸른 숲이 보이고 푸른 숲 뒤로 아파트가 보인다. 아파트의 높이는 꽤 높아 방에서도 남한강을 바라볼 수 있을 것 같다. 경치 좋은 곳에 자리 잡은 아파트에서 사는 사람들은 행복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남한강가 바위 위에 자리 잡은 정자에 오르니 시원한 강바람이 불어온다. 오늘도 햇빛이 열기를 뿜어내는 무더운 날씨다. 정자에 앉아 있으니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고 이 곳에서 낮잠이나 푹 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집에서 싸가지고 간 떡을 아침 대용으로 먹었다. 한 사람이 다가와 사진기로 사진을 분주히 찍고 있다. 사진 작가인 듯 여러 가지 포즈로 사진을 열심히 찍는다.
<강월헌>
정자가 서 있는 바로 위 언덕에 10여m는 될 듯한 탑이 서있다. 탑을 돌아 가니 신륵사 다층전탑에 대한 설명판이 서 있다. 설명판에는 전탑이란 흙으로 구운 벽돌로 쌓은 탑을 말하며 우리 나라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탑이란다. 이 전탑은 고려시대의 유일한 전탑으로 높이가 9.1 m이고 기단과 계단은 화강암으로 기단은 2층의 구조이며 다시 3단 계단을 올렸다. 탑신은 6층으로 벽돌을 쌓았다.고 써 있었다.
<신륵사 다층전탑>
신륵사 다층전탑 바로 뒤에 건물이 보인다. 건물에는 대장각기비각이란 현판이 붙어있다. 이 비는 신륵사 대장각을 세운 내력을 기록한 비로 목은 이색이 공민왕의 명복을 빌고자 보제존자 나옹의 제자들과 대장경을 인쇄하고 이를 보관하기 위해 이 곳 신륵사에 2층의 대장각을 짓게 되었으며 이 때 건립에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과 공적을 적어 놓은 비를 보관하기 위해 전각을 지었다.고 한다. 대장각기비각을 둘러보고 신륵사 경내로 내려오는 길에 커단란 나무가 서 있다. 참나무와 은행나무다. 영주군청에서 보호하고 있는 보호수라는 설명판이 서 있다. 두 그루 모두 600 년이 넘는단다. 이 신륵사에는 600년이 넘는 보호수로 이 곳의 참나무, 은행나무 그리고 조사당 앞에 향나무가 서 있다.
<대장각기비각>
신륵사 극락보전은 현재 해채보수중이다. 극락보전 터에 건물은 보이지 않고 터 앞에 극락보전 연혁이라는 설명판만 있고 극락보전이 서 있던 자리는 천으로 덮혀 있었다. 그 설명판에는 극락보전에는 아미타부처님을 주존으로 모셨으며 유형문화재 제 128호로 우왕 5년 나옹 선사가 입적 후 스님들이 중창하고 세종 22년 중수를 거쳐 성종 4년에 대대적인 중수를 하였다는 내용과 그 밖에도 여러 차례 중수를 거친 내용이 적혀 있었다. 최근에도 2009년 4월부터 2010년 7월까지 해체보수하였고 2011년 3월부터2011년 11월에 보수복원할 예정이라고 적혀 있다. 현재는 극락보전터 앞 2층 건물에 극락보전에 모셔져 있던 부처님을 임시로 모셔 놓은 듯 하다.
<극락보전터>
극락보전 터 옆에는 조사당 건물이 서 있다. 조사당은 보물 18호로 신륵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지공, 나옹, 무학 3화상의 영정을 모셔 놓은 건물이다. 극락보전터 앞에는 보물 제 225호의 다층 석탑이 서 있다.
<조사당>
<향나무 보호수>
신륵사 탐방을 마치고 집으로 오려고 네비게이션에 집을 입력하고 차를 출발했다. 차는 신륵사 관광단지로 주차장에 도착하였다. 관광단지의 넓은 주차장에는 차가 몇 대 서 있지 않았다. 주차장 가에 상가들이 즐비한데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다. 주차장 바로 앞에 여주 박물관이 보여 박물관으로 갔다. 여주박물관 앞 마당에 주차를 하고 박물관안으로 들어 갔다. 박물관은 왕릉을 기획 전시하고 있었다. 여주에도 세종대왕과 소현왕우의 합장릉인 영릉이 있고 효종 임금님의 릉이 있는 것을 알고 세종대왕릉에 가 보기로 했다. 박물관에서 나와 네비게이션에 영릉을 입력하니 4km 정도라는 안내가 나온다. 우리는 영릉에 가보기로 하고 차를 몰았다.
<여주박물관>
여주박물관을 나와 남한강을 건너니 여주 읍내가 나온다. 네비게이션이 안내하는 대로 여주 읍내 시가지를 벗어나 자동차를 달리니 갈래길이 나온다. 왼쪽은 세종대왕릉 이고 오른쪽은 효종대왕릉으로 가는 길이다. 세종대왕릉으로 500여 m 들어갔을까 세종대왕릉 주차장이다. 600원하는 입장료를 지불하고 세종대왕릉으로 들어갔다.
<영릉안내판>
이 영릉은 세종대왕과 소헌왕후를 합장한 릉으로 세종대왕릉은 원래 서울 헌릉 서쪽에 있던 것을 예종 원년에 이쪽 여주로 옮겨 왔다고 한다. 세종대왕릉 경내로 들어가자 왼쪽에 벽에 횐색 칠을 한 날아갈 듯한 건물이 보이고 오른쪽으로는 잔디밭에 세종대왕 동상이 서있다. 왼쪽 건물에는 세종전이란 현판이 붙어있고 세종대왕에 대한 역사적 사료들을 전시해 놓았다. 세종전 앞 잔디밭에는 세종대왕 때의 각 종 발명품이었던 자격루, 간의 등의 과학기구 모형 들이 전시되어있다. 세종전에는 세종대왕의 업적으로 각종 서적의 출판, 악악정리, 과학의 발전 등을 설명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세종대왕동상>
<세종전>
세종전을 나와 세종전 앞 기와 건물로 갔다. 건물은 입구의 대문 옆에 행랑이 있으며 대문 바로 앞에 본체 건물이 있다. 건물에는 영릉의 4계라는 사진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영릉의 4 계절 사진을 본체 대청과 담벼락에 전시하고 있었다. 건물로 다가가니 청소하는 아주머니가 반갑게 맞아주며 어서 오시란다.
< 영릉의 4계>
훈민문은 영릉의 대문 역할을 하는 문으로 훈민문 양쪽으로 담장이 설치되어 있다. 훈민문은 3개의 문이 있는데 중앙문은 닫혀 있고 양쪽으로만 통행할 수 있도록 양쪽의 문이 열려있다. 왼쪽문은 장애인도 다닐 수 있도록 경사로가 설치되어 있다. 훈민문을 들어서면 홍살문이 보인다. 홍살문부터 정자각 앞까지 양쪽은 문화재 발굴이 한창이다. 철판으로 담장이 처져 있어 안을 들여다 볼 수 없다.
<훈민문>
<홍살문>
홍살문을 지나면 돌로 길을 깔아 놓았는데 가운데가 올라오고 양쪽은 낮다. 가운데 높은 곳으로는 임금님만 행차하는 길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홍살문을 지나면 바로 앞에 건물이 하나 보이는데 정자각이다. 건물이 한자 정(丁)자를 닮았다고하여 정자각이라 부른단다. 이 정자각은 릉에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제물을 차려 놓고 임금이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이 곳 정자각 안에서 뒷문을 열면 건물 뒤의 릉이 훤히 보인다. 제사를 지낼 때 옷을 갈아 입는 곳이다.
<정자각>
정자각 왼쪽과 오른쪽에 건물이 있다. 왼족의 건물은 수라간이고 오른쪽은 수복방이다. 수라간에서는 제물을 준비하는 곳이다. 오른쪽의 수복방에는
<수라간>
<영릉>
왼쪽의 약간 비탈진 길을 걸어 영릉에 올랐다. 영릉 앞에는 여러 가지 석물들이 있으며 담장이 처져 있다. 오른쪽으로 내려오면 비각이 있고 비각 안에는 영릉비가 서 있다. 너댓명의 대학생들이 부지런히 메모하며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학생들끼리 나누는 대화의 내용이 귓가를 스쳐간다. 역사를 전공하는 학생들로 보이는 깊이 있는 대화가 오간다. 영릉비와 수복전을 둘러보고 걸어 왔던 길을 되짚어 주차장으로 왔다.
<영릉비>
<수복방>